3卷1冊 : 四周雙邊 半郭 18.1 x 11.4 cm, 10行24字, 上下黑魚尾 ; 25.9 x15.0 cm.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수오의 시문집이다. 동강 김우옹의 6세손으로 경북 성주의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 남은공(南隱公) 여수(汝粹)가 육갑(六甲)을 가르치자 바로 이를 터득 했으며, 10세 때 소학과 경서를 읽고시를 지을 만큼 자질이 남달랐다. 11세 때 아버지를 따 라 삼가 구평의 오리(吾里)로 이사를 왔으며, 동학들과학문에 정진하였다. 26세 때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극진한 예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했으며, 상을 마치고 강좌지역(요즘 경북지역) 으로 가서 대산 이상정, 칠계(漆溪) 최흥원(崔興源) 등 당대대선비들을 만나 학문을 질정하고 돌아왔다. 남애가 만난 대산은 당시 안동에서 학술을 강론하여 많은 제자를길렀는데,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칠계 역시 대구에서 학문과 제자 양성에 많은 노력을기울이고 있었다. 35세 때 아버지가 병상에 눕게 되자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어머니상처럼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상을 마치자마자단성의 법물에 남애정을 지어 배우 러 오는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스스로 호를 ‘남애’라고 지었다. 남애는 ‘남쪽끝자락’이란 뜻이다. 세상의 번잡한 일을 잊고 궁벽한 곳에살면서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1767년, 즉 47세 때 남애가 법물 도장골에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도와기(韜窩記)’라는 글을 지었다.
이 문집은 5세손 원(源)이 원고를모아 간행을 하였다. 특이한 것은 『남애집』을 발간한 곳이 중국 회남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인데, 나라가망하자 중국으로 망명한 한말 문장가 창강 김택영이 운영하던 곳이다. 당시 창강 김택영이 친하게 지내던심재 조긍섭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간행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